본문 바로가기

같이보자

이장욱 -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이장욱은 내게 소설가였고, 소설가이고, 앞으로도 소설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소설로 처음 만났으니까.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내게 참 특별한 소설이고,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는 이장욱의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인도 여행을 하기 전, 서점에서 인도 여행 중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고, 다만 바라나시라는 지명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그 노란 책을 구입했었다. 그리고 인도 여행을 하다 만난 누군가는 내게 '기린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습관'이 있다고 말했고, 아직까지 나는 그 정확한 의미가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으나 앞으로는 기린에 대해 말해보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고, 참 그 제목부터가 냉정하다는 생각을 할 무렵 이장욱이라는 이름을 보았고, 그럴싸하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 이장욱이 그 이장욱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설을 닮은 시인지 시를 닮은 소설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소설을 먼저 보았으므로 소설을 닮은 시라 하겠다. 시를 즐겨 읽는 편도 아니고 시집을 잘 사는 편도 아니지만 이 시집은 구입했다. 내용을 굳이 보지 않고도 구입했다. 이제 내 책장의 몇 안 되는 시집 중 하나가 되었다.

 

-----

 

초점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과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갔다.

 

겨울의 깊이가 맞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각종 세금을 내고

신문을 읽고

거짓말을 했다.

조금씩 너를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너의 끝까지

닿으려고도.

 

나는 명료하게 살아갔는데

거울 속의 내가 어딘지 흐릿하였다.

말을 했는데 또

하려던 말과 조금 달랐다.

액수가 맞지 않고

기사마다 오탈자가 있었다.

 

그것들이 아주 흡사해서

나는 원숭이의 길고 아름다운 팔을 쭉 뻗어서

저기 저 어둠이 아닌 것을 콱!

움켜쥐었다.

 

네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안경을 바꾸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더 깊은 곳에서 누가 그것을

살아갔다.

 

 

-----

 

내 인생의 책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

당신의 표정

당신의 농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거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토씨 하나 덧붙일 수 없도록 완성되었지만

눈 내리는 밤이란 목차가 없고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한 문장에서

 

-----

 

필연

 

 

나는 야위어가면서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필연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그것을 애인이라고

생일이라고

 

신문사에 편지를 쓰고 매일 실망을 했다.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에테르로 변하는 세계를 사랑하였다.

강물이 무너지고

돌이 흘러갈 때까지

 

사랑을 합니다, 라고 적고

밤과 수수께끼라고 읽었다.

최후라고 읽었다.

토성에는

토성의 필연이 있다고

칼끝이 우연히 고독해진 것은 아니라고

 

그런 밤에는 인기척이 툭,

떨어졌다.

누가 지금 막 내 곁에 태어났다는 듯이.

마침내 이 세계에 도착했다는 듯이.

오래전에 자신을 떠나

검디검은 우주 공간을 지나온 별빛의 모습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으로 누워 있는데

누군가 하늘 저편의 검은 공간을

내 이름으로 불렀다.

 

-----

 

깜빡임

 

 

네가 없는 듯하다가 거기

처음부터 있었다고 느끼지.

보이다가 무수히

보이지 않는

 

너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 깜빡

사라졌구나.

내가 없는 곳에서 문득

태어났구나.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건 방금 일어난 일.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중이지. 어둠이었다가

순식간에 동이 트는 세계.

잠깐 뒷모습을 놓쳤다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갑자기 시들어버린 공기를 이해하고

죽은 이의 목소리를 듣는.

 

밤이 오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기서 네가 살고 있구나.

깜빡임도 없이.

내 인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나는 목이 긴 기린을 꺼냅니다. 호주머니에서가 아니고

당신과 마시던 술잔이라든가 휴대전화에서가 아니고

명백한

초원에서

 

기린은 기린인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이도시의 골목들을 거닐 뿐

담장 바깥으로 넘어온 나무줄기를 느리게 씹으며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를

 

나는조금씩 키가 자라고

길어진 목으로 출근을 하고

서서 낮잠을 자고 저녁에는

해 지는 강변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윽고

당신이 나를 꺼냅니다. 주섬주섬 호주머니에서

초원에서

내가 아닌 모든 것과

나의

명백한 사이에서

'같이보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 애니메이션 1-5  (0) 2016.07.28